용장 글램핑

[경상북도 경주시] 용장 글램핑


경상북도 경주시 용장 글램핑 캠핑장 대표 사진

용장 글램핑 위치 및 연락처

운영 정보

  • 예약 구분: 온라인실시간예약
  • 민간 캠핑장, 직영으로 운영 (운영)
  • 운영기간: 봄,여름,가을,겨울
  • 운영일: 평일+주말
  • 업종: 글램핑
  • 입지: 숲

캠핑 사이트 정보

  • 글램핑: 11면 (내부시설: 침대,TV,에어컨,냉장고,유무선인터넷,난방기구,취사도구,내부화장실)

부대시설 및 안전 설비

  • 화장실: 11개
  • 샤워실: 11개
  • 개수대: 11개
  • 화로대: 개별
  • 소화기: 11개
  • 부대시설: 전기,무선인터넷,장작판매,온수,물놀이장,놀이터,산책로,운동시설
  • 부대시설 기타: 한옥펜션
  • 주변이용가능시설: 계곡 물놀이,산책로,어린이놀이시설

이용 안내

  • 영업배상책임보험 가입
  • 애완동물출입: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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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캠핑장 5선

주위 관광 정보

신라 월성대군 단소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포석로 534-1

신라 월성대군 단소는 월성 박 씨의 후손 11위를 모신 곳으로 2005년 월성 박 씨 대종회가 조성했다. 월성대군은 신라 박혁거세의 29대손 경명왕의 8번째 왕자 박언의를 일컫는다. 박언의는 월성대군에 봉해졌을 당시부터 월성 박 씨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신라 월성대군 단소엔 넓은 잔디와 다양한 식물과 나무가 어우러져 있어 여유롭게 산책이 가능하고 첨성대를 비롯해 경주 교촌한옥마을, 동궁과 월지 등이 가까이 있어 연계 관광도 용이하다.

경주 경덕왕릉

– 홈페이지
경주문화관광 http://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 산8

신라 제35대 경덕왕(재위 742∼765)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곳으로 경주 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왕실의 전제왕권이 쇠퇴하기 시작하는 시기에 왕위에 올라 행정구역과 관직제도를 개편했다. 봉분은 둥근 모양이며 무덤 주위에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둘레돌을 둘렀다. 둘레돌은 목조건축물의 돌기단 같은 형태로 되어 있는데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면석을 둘렀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배치하였다. 탱석에는 두 칸 건너 하나씩 무인 복장을 하고 무기를 든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면석과 탱석 위에는 덮개돌이 놓여 있다. 이 둘레돌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돌기둥 40개를 세워 난간을 둘렀다. 무덤 앞에는 안상문을 새긴 높은 석상이 놓여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돌사자·문인석·무인석 같은 석조물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무덤의 자리가 이곳인지 확실치 않고, 둘레돌을 다듬는 수법이나 12지신상의 조각수법이 신라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여 이 무덤이 경덕왕의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경주 경애왕릉

경주 경애왕릉 사진
– 홈페이지
https://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3-1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재위 924~927)의 무덤이다. 경애왕은 신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생으로, 경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사를 보내어 고려를 도왔다. 927년에 포석정에서 제사를 지낸 후 연회를 베풀던 중 그곳을 기습한 후백제의 견훤에게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덤은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 안에 있다. 무덤의 가장자리를 따가라며 둘레돌로 보이는 석재가 일부 드러나 있다.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

삼릉숲

삼릉숲 사진
– 홈페이지
https://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삼릉숲은 경주 남산 서쪽에 위치한 소나무 숲으로 삼릉이 위치해 있으며, 능 주변으로 아름드리 도래솔이 군무하듯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경주 남산은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 모두를 이르는 것으로 고대국가 신라의 중요한 국사를 의논하던 사령지이면서 초기 궁궐지, 왕릉, 불교 조각 등 수많은 문화유산이 분포되어 있는 신라와 경주의 신령스러운 공간이다. 그리고 김시습이 남산 금오산실에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 소설 금오신화 등 다양한 저술 활동을 한 문학적 고향이기도 하다. 경주는 다양한 역사 수림을 간직한 역사 도시로 사진작가들에게 숲 촬영지로 가장 유명하다. 구불구불한 소나무들 사이로 내리는 햇빛은 가히 환상적이며 봄날 소나무 사이로 피는 진달래도 진풍경 중 하나이다.

경주 배동 삼릉

경주 배동 삼릉 사진
– 홈페이지
http://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73-1

경주 배동 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졌다.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경주 배동 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 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남산 화강암 (경북 동해안 국가지질공원)

남산 화강암 (경북 동해안 국가지질공원) 사진
– 홈페이지
https://geotourism.or.k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순환로 341-126 (배동)

경주시의 남쪽에 위치한 남산은 금오봉과 고위봉을 중심으로 한 긴 타원형의 화강암 바위산이다. 화강암은 석재로 흔히 쓰이는 대리암이나 석회암에 비해 단단하고 비와 바람에 잘 깎여나가지 않는 특성을 가진다. 따라서 남산의 수많은 문화재들이 오랜 시간 동안 잘 보존된 것은 화강암의 이러한 특성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남산 화강암은 신라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손꼽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을 만들 때도 쓰였기 때문에 신라인들이 남산 화강암을 문화재의 재료로 많이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인들은 남산의 바위절벽을 이용하여 남산 문화재 중 으뜸으로 꼽히는 마애삼존불좌상, 선각여래좌상, 마애석가여래좌상과 같은 불상들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바위 절벽은 남산 화강암에 흔히 잘 발달하는 수직 틈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다른 화강암들보다 남산에 분포하는 화강암이 특히 수직 틈을 많이 가지는 이유는 아주 오래 전 이 지역에 단층활동이 일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

– 홈페이지
http://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순환로 341-126 (배동)

경주시 배동의 거대한 자연 바위벽에 새긴 앉아 있는 모습의 석가여래불로 높이는 6m이다. 남산의 좌불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하던 양식의 마애불로 추정된다. 바위 자체가 약간 뒤로 기울어져 있어 조각된 불상이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보인다.
몸을 약간 뒤로 젖히고 있으며, 반쯤 뜬 눈은 속세의 중생을 굽어살펴 보는 것 같다. 머리에서 어깨까지는 입체감 있게 깊게 새겨서 돋보이게 했으나 몸체는 아주 얕게 새겼다. 이곳에 있는 다른 불상들의 세련되고 단정한 얼굴과는 달리, 이 불상은 약간 투박한 느낌을 준다.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사진
– 홈페이지
http://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65-1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三尊佛]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표면이 매끄럽게 표현되었다.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난 얼굴은 풍만하며,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을 통하여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佛性]을 표현하고 있다. 목이 표현되지 않은 원통형의 체구에 손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는데,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올리고 있다. 묵직해 보이는 옷은 불상을 전체적으로 강직해 보이게 하지만, 어린아이 같은 표정과 체구 등으로 오히려 따뜻한 생명을 실감 나게 표현하고 있다. 왼쪽의 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가는 허리를 뒤틀고 있어 입체감이 나타난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보병[寶甁]을 잡고 있는데, 보관에 새겨진 작은 부처와 더불어 이 보살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오른쪽의 보살 역시 잔잔한 내면의 미소를 묘사하고 있는데, 무겁게 처리된 신체는 굵은 목걸이와 구슬장식으로 발목까지 치장하였다. 조각솜씨가 뛰어난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풍기고 있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경주 지마왕릉

경주 지마왕릉 사진
– 홈페이지
tps://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30

신라 제6대 지마왕(재위 112~134)의 무덤이다. 지마왕은 신라 5대 파사왕의 아들로 태어나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았다. 지마왕의 재위 기간에는 신라는 백제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으나 가야와는 낙동강 하류를 둘러싸고 패권을 다투었다. 왜인들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으나 교섭하여 강화를 맺었고, 북쪽에서 말갈이 쳐들어오자 백제의 도움을 받아 물리쳤다.
무덤은 포석정에 남쪽으로 200m 떨어진 남산 서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왕릉 중에서는 작은 편에 속하며, 외형과 입지로 보아 내부 구조는 굴식돌방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경주 포석정지

경주 포석정지 사진
– 홈페이지
http://www.gyeongju.go.kr/tour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454-3

경주 남산 서쪽에 있는 포석정은 왕이 술을 들면서 즐길 수 있도록 마련된 별궁의 하나였으나,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조성연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 때로 본다. 규모는 폭이 약 35㎝, 깊이 평균 26㎝, 전체 길이가 약 10m이다.
포석정은 중국 고대 강가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악귀를 쫓는 행사의 하나인 유상곡수연에서 유래하였다. 353년 중국의 왕희지가 쓴 난정서문에 보면 맑은 시냇물을 아홉 구비로 돌아 흐르게 하여 흐르는 물속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게 하되 술잔이 아홉 구비를 다 지날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벌술 3잔을 마시게 하였다. 유상곡수를 즐기는 주위는 높고 험한 산이 있고, 숲과 대나무숲이 있으며 옆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한다. 이에 신라에서도 험한 남산 봉우리를 뒤로 하고 죽림과 송림이 울창하고 맑은 시내가 흐르는 계곡에 포석정을 만들었던 것이다. 원래는 남산계곡에서 흘러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 모양의 큰 돌이 있었고, 그 입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져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고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이곳에 와서 남산 신의 춤을 따라 해 어무상심무를 만들었다 한다. 또한 이곳은 인간의 마음을 수양하고 화랑이 정신을 도야하며 시문을 짓고 속세를 떠나 유정을 느끼던 아름다운 장소였다. 927년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며 놀고 있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붙잡히게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신라 천 년 역사의 치욕이 담긴 장소이기도 하다. 화랑세기필사본에서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社)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1998년 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곳에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제기류도 출토되어 포석정이 연회를 즐기던 곳이 아니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신성한 장소였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입구 포석정지 방문자센터에서는 포석정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모형과 영상물을 상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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